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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앙일보] AI 시대의 창작과 번역 (정과리 / 2026.10.21.) 본문
https://www.joongang.co.kr/article/25471430
[정과리의 AI와 함께하는 인문여행] AI 시대의 창작과 번역 | 중앙일보
이미 한국 언론에서도 보도된 바 있듯이, 최근 혜성처럼 등장한 한 작가의 베스트셀러가 AI에 의해 쓰였다는 판정이 나오는 스캔들이 발생했다. 캐나다·아이티계 작가 텔리송 오렐리앙의 『C’e
www.joongang.co.kr
이미 한국 언론에서도 보도된 바 있듯이, 최근 혜성처럼 등장한 한 작가의 베스트셀러가 AI에 의해 쓰였다는 판정이 나오는 스캔들이 발생했다. 캐나다·아이티계 작가 텔리송 오렐리앙의 『C’etait ca ou mourir(그것이 아니면 죽음)』(2026)라는 아이티 난민의 수난을 다룬 소설이 문제아가 되었다. “가장 신뢰할 만한 AI 텍스트 검증 분석 도구”로 평가받는 팡그람(Pangram)을 가동하여 소설 텍스트를 검증한 결과 “생성형 AI로 작성되었을 확률이 90~100%”라는 압도적인 수치가 나왔다는 폭로가 X(옛 트위터)의 익명 계정을 통해 발표됐다. ....
문단과 언론의 반응은 ‘자라 보고 놀란 가슴’이 되었다. 프낙 소설상을 수상하고 5만부가 팔려 나가며 공쿠르·페미나·르노도상 후보에 올랐던 이 작품은, 폭로가 있은 지 며칠 뒤인 9월 25일 공쿠르상 후보 목록에서 공식 제명당했다. .... 인간의 영역을 지키려는 노력이 치솟아 올랐다. 한 출판사에서는 ‘100% 인간 전용’ 총서를 발주하였다. 즉 AI가 전혀 개입하지 않은 순수 인간 저작물만을 출판하겠다는 것이다. .... 심지어 유기농 식품 라벨처럼 도서 표지에 ‘AI 미사용 인증’이나 ‘AI 활용’ 띠지를 의무화하자는 제안까지 나오고 있는 실정이다.
한국에서도 그 비슷한 일이 있었다. 수년 전 한국문학번역원이 주관하는 한국 작품을 외국어로 번역하는 공모 대회에서 수상한 일본인 번역가가 기자와의 대화 도중에 파파고를 참조했다고 한 말이 “AI 번역에 상을 주다니!”라는 소동을 일으켰다. 주관 기구는 즉각 이 문제에 대한 심포지엄을 마련하고, 향후 AI를 참조하는 번역을 일체 불허하는 방침을 내렸다.
이런 반응들의 상당수는 실제 현실을 외면하고 있다는 게 필자의 솔직한 판단이다. 간단히 말해, AI를 이용하는 번역 및 창작이 위축될 가능성은 거의 없다. .... 독자들 역시 엄격한 조치를 믿지 않는다. 오렐리앙의 소설은 지금도 베스트셀러 순위의 최선두를 유지하고 있다. 그러니 엄격한 조치는 오히려 사람들에게 허위를 종용하는 꼴이 될 뿐이다. 게다가 이런 태도는 AI와의 경쟁에서 질 수밖에 없다는 항복 선언을 미리 하는 꼴에 지나지 않는다.
피지컬 AI인 로봇에서 최고의 난관이 감속기와 관절부라는 건 잘 알려져 있다. 이는 AI가 아직 인간만큼 섬세하지 못하다는 걸 가리킨다. 그리고 이 섬세함이야말로 인간이 계속 주도할 수 있는 유일한 능력이라고 필자는 생각한다. .... 인류의 역사에서, 특히 정치사에서 모든 폭력과 재앙은 바로 이 섬세함의 무시 혹은 자의식의 부재에서 비롯된다. .... 그래서 현장 철학자로서 노동자에서 레지스탕스를 거쳐, 전쟁 중 사람들의 고난을 생각해 금식을 실천하다가 요절한 시몬느 베이유(Simone Weil)는 ‘주의(注意)의 정치’와 ‘섬세함의 덕목’을 특별히 강조하였던 것이다.
창작과 번역에 대해서도 AI와 뛰어난 인간 작가를 구별하는 기준도 섬세함만이 유일할 것이다. 화려하고 매끄럽지만 상투적인 문구가 있고, 까다롭고 난해하지만 글의 결을 찾아가면서 따라가면 감동이 샘솟는 문장이 있다. 바로 그런 것들을 완상하고 음미할 수 있는 정신적 능력이 섬세함이다. AI를 바람직한 방향으로 인도할 수 있는 것도, 사람들 사이의 폭력을 최소화할 수 있는 것도 섬세함이다. 그러니까 인간은 지금 자신에게 잠재된 그 능력을 더욱 개발해야 한다. 그것만이 AI와의 공존과 협력의 무대에서 인간이 내놓을 수 있는 독보적 자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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